독일에서 프라하로 넘어갈 때 주의사항
체코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비넷이란것을 구입해서 차량에 붙이는것으로 대신함.
체코 국경을 넘어서 휴게소나 주유소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정식 명칭은 'Bignette' 최소단위 1주일권부터 1년권까지 있다고 함. 최소 310CZK부터~
2단으로 분리가 되며 위에거는 차량에 붙이고 밑에거는 영수증이라함.
독일에서 체코로 넘어가는 곳에 검문소는 없다고 하나, 혹시 모르니 여권지참 할 것!!
고속도로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100m마다 1개씩 속도제한 카메라가 있다고 함.
주의할 것!!
체코에서의 여행 코스는 대략적으로,
미루하우스
바츨라프광장
화약탑
틴성당
천문시계탑
까를교
프라하성
성비투스성당
존레논의벽
미루하우스
주소 : vodickova19, praha1
출입문 옆 MIRU 벨을 누르시고 5층까지 엘레베이트를 이용
체크인 할때 2인실 + 4인실 190유로 결제
체크인은 2시 체크아웃은 10시에 해야 함
아침은 08시에 주고, 저녁은 삼겹살이나, 제육볶음, 짬뽕같은것을 해준다고함
일단 짐부터 맡기고 주차하세요~ (아마 팁을 알려주실것 같음)
점심 먹을곳을 물어보자~ 투어시작하기 전에 바로 먹어야 할 것 같음
저녁은 몇시쯤 주시는지 여쭤보자!! 저녁먹고 야경보러 나가는 걸로~!!
바츨라프광장
블타바 강 왼쪽 지구로 중세 시대 카를 4세에 의해 조성된 신시가지에 속한다. 원래 마(馬) 시장이 섰던 곳이며 광장 가운데 사형대가 세워졌던 역사도 있다. 너비 60m, 길이 750m의 광장은 엄밀히 말하면 광장이라기보다 드넓은 대로에 가깝다. 현재는 중앙 녹지를 경계로 차도와 인도가 나뉘어 있다. 광장 이름은 체코의 최초 왕조인 프르셰미슬 왕가의 왕 바츨라프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는 사후에 성인으로 추대된 체코 기독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광장 동남단에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성인 4명의 수호를 받으며 서 있다.
무엇보다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무대이며 여러 차례 프라하 시민의 집회가 열린 민주화의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다. 1918년의 체코슬로 된다. 광장에는 자유화 운동 당시 소련의 무력 개입에 항거하는 뜻으로 목숨을 끊은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 두 젊은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바키아 독립 선언이 이 광장에서 선포되었고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이라 일컫는 자유화 운동이 일어나 광장 일대가 모여든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프라하의 봄은 소련의 군사 개입으로 큰 희생을 치렀지만 결국 1989년에 같은 장소에서 몇 십만의 시민들이 광장을 메우며 공산 정권의 몰락을 이끌어 낸 벨벳혁명이 일어나게
오늘날에는 호텔과 백화점, 부티크 등이 늘어서 있는 프라하 최고의 번화가로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붐빈다. 바츨라프 광장 주변은 걸어도 좋지만 주변에 흩어져 있는 미술관과 기념관을 돌아보려면 트램이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화약탑
프라하역(驛)에서 남쪽으로 500m 지점에 프라하 국립박물관이 있고, 이 곳에서 다시 바츨라프 광장과 무스테크 광장을 지나면 오른쪽에 화약탑이 있다.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뉘는 지점으로, 옆에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시민회관이 있다.
1475년 지금의 구시가지를 지키는 13개 성문 가운데 하나이자, 대포 요새로 건설되었다. 이후 총기 제작공이자 종(鐘) 주조공인 야로스(Tomas Jaros)의 거처 겸 작업실로 개축되었다가, 루돌프 2세 때인 17세기 초에 연금술사들의 화약창고 겸 연구실로 쓰이면서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딕 양식의 탑으로, 높이는 65m이며, 총 186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라하의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달리 어둡고 칙칙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과 여왕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자, 외국 사신들이 프라하성(城)으로 들어올 때는 꼭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이용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연금술이나 종 주조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약탑과 나란히 있는 길이 신시가지, 탑을 지나 서쪽 길이 구시가지가 각각 시작되는 곳이다. 인근에 프라하의 대표적인 유적지이자 관광지인 프라하성, 바실리카, 황금소로(黃金小路) 등이 있다.
틴성당
1365년 고딕 양식으로 건축한 교회로 성 비투스 대성당과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 작은 탑이 주변을 에워싸고 그 중앙에 우뚝 선 쌍탑이 인상적인데, 프라하 시내 어디에서든 보인다. 꼭대기가 금빛으로 빛나는 쌍탑은 높이가 80m로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프라하에서 단연 눈에 띈다. 원래 쌍탑 사이에는 후스파를 상징하는 황금 성배가 있었는데 1621년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하면서 황금 성배를 녹여 마리아의 후광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천문시계탑
프라하 구시청사 벽에 걸려 있다. 1410년 시계공 미쿨라시(Mikulas of Kadan)와 뒷날 카를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얀 신델(Jan Sindel)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1490년 달력이 추가로 제작되고, 외관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1552년 시계 장인 얀 타보르스키(Jan Taborsky)가 시계를 수리하면서 원래의 제작자로 하누시(Hanus)를 언급하였다. 이후 더 이상 똑같은 시계를 제작하지 못하도록 하누시의 눈을 멀게 만들고, 그의 죽음과 함께 시계 또한 작동이 멈추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졌는데, 오늘날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1552년 이후 시계는 여러 번 작동을 멈추었고 그때마다 수리가 뒤따랐다. 17세기에 움직이는 조각상을 덧붙이고, 1865년과 1866년에는 복구작업 끝에 사도들의 형상을 추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전쟁의 영향으로 일부가 파손되면서 다시 작동을 멈추었으나 이후 보수를 거듭한 끝에 1948년에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프라하의 명물로 손꼽히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시계를 보기 위해 몰려든다.
시계는 상하 2개의 큰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시계를 칼렌다륨, 아래쪽을 플라네타륨이라고 부른다. 칼렌다륨은 천동설의 원리에 따른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하였다. 일반적으로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연, 월, 일, 시간을 나타낸다. 아래쪽 원은 12개의 계절별 장면들을 묘사하여 제작 당시 보헤미아의 농경생활을 보여준다. 매시 정각이 되면 칼렌다륨 오른쪽의 해골 모형이 움직이면서 12사도들이 2개의 창을 통해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어서 시계 위쪽의 황금색 닭이 나와 울면서 시간을 나타내는 벨이 울린다.
까를교
블타바 강 우안의 구시가지와 좌안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프라하 성을 연결해 주는 카렐교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이다. 135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프라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카를 4세가 블타바 강에 놓은 다리로 너비 10m, 길이 520m에 이른다. 성 비투스 성당을 지은 페테르 파를레르시가 공사를 맡아 바츨라프 4세 때인 1402년에 완공되었다.
16개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이 다리는 유럽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다리의 시작과 끝 부분에 놓인 탑은 본래 통행료를 받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블타바 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300년에 걸쳐 제작된 30개의 성인상도 볼거리다. 다리 양옆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성 요한 네포무크, 성 루이트가르트, 성 비투스 등 체코의 유명한 성인 조각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 조각상들은 모두 성경에 나오거나 성인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을 새겨 놓은 것인데 그중 성 요한 네포무크 조각상이 가장 유명하다.
성 요한 네포무크는 바츨라프 4세가 왕비 조피에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달라고 한 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이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난간에는 작은 청동 십자가 5개가 있는데 십자가에 손을 내밀어 5개의 별 중 하나를 만지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또 조각상 밑단에 그의 순교 장면이 묘사된 부조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 때문에 유독 새까맣게 손때가 많이 탔다. 성인상들은 모두 모조품이고 국립 박물관에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볼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카렐교는 원래 마차가 다니며 양쪽의 교역 역할을 하는 용도로 쓰였지만 대대적인 공사를 거친 후 지금은 보행자 전용 다리로 이용되고 있다.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기 때문에 음악과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 예술의 다리로도 유명하며 악사와 초상화 그리는 화가, 마리오네트 인형극이 펼쳐진다. 단,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인 만큼 관광객을 노리는 소매치기들이 많으니 소지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카렐교는 프라하 성의 가장 아름다운 전경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구시가 교탑에서 내려다보는 프라하 성과 블타바 강의 전경이 매우 인상적이다. 카렐교를 지나 말라스트라나 광장에서 프라하 성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인 네루도바 거리에는 다양한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가 즐비해 시내 관광 중 잠시 쉬어가기 좋다.
프라하성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9세기 말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카를 4세 때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 양식이 가미되면서 복잡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변화하다가 18세기 말에야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블타바강(江)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길이는 570m, 너비는 128m이며,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된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성(聖)비투스대성당·성조지바실리카·성십자가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성조지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첨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십자가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면서 이 때부터 체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뒤 블라디슬라프 2세 때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고, 1526년 합스부르크왕가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다시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었다. 그러다 바로크시대인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는데, 시작에서 완성될 때까지 900년이나 걸렸다.
1918년부터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내부 장식과 정원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왕궁뿐 아니라 성 안에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정교한 조각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유럽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라하뿐 아니라 체코·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명소이며, 특히 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티켓 관련
Circuit B : 성비투스 대성당, 구왕궁, 성이지르바실리카, 황금소로 = 250CZK
괜찮은곳 대부분 볼 수 있다고 함.
하지만, 성비투스대성당도 티켓없이 내부 입구쯤까지 가볼 수 있다고 하니, 구지 안 끊어도 될것같다고 함.
줄이 길 순 있음.
끊고 들어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고 함.
성비투스성당
프라하성 중앙에 있다. 1344년 카를 4세 때 착공하여 1929년에야 완공되었다. 최초의 설계자는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마티아스(Matthias of Arras)였다. 그가 1352년 숨을 거두자 당시 23세의 페터 파를러(Peter Parler)가 뒤를 이었고, 이후 파를러의 아들과 또 다른 건축가들이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갔다. 공사는 후스(Jan Hus)의 종교개혁 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다. 16세기 중엽 르네상스식 첨탑이 완공되고, 17세기에 양파 모양의 바로크식 지붕이 모습을 드러냈다. 1753∼1775년 사이에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신고딕 양식의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다.
성당의 규모는 길이 124m, 폭 60m, 천장 높이 33m, 첨탑 높이 100m에 이른다. 정문 바로 위를 장식한 지름 10.5m의 ‘장미의 창’이 인상적이다. 성당 안쪽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기법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가 제작한 아르누보 양식의 작품이다. 성당 지하에는 역대 체코 왕들의 석관묘가 안치되어 있으며, 본당 주위에는 체코의 수호성인 성(聖) 바츨라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화려한 예배당이 있다. 예배당의 벽면은 보석과 도금으로 장식되었고, 여러 성인들과 성서 속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존레논의벽
원래는 몰타 공화국 대사관의 담벼락이었다고 하는데, 1980년 존레논이 사망하고 그를 추모하는 노랫말과 그림이 벽에 그려지면서 당시의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정부 구호들도 함께 적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골목길 안쪽에 있는 이 벽은 치외법권인 대사관이라 체코정부가 그림을 지울수 없었고, 몰타 공화국 역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 벽을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벨벳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정권이 붕괴되고 이후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2014년 11월에 한 예술가그룹이 벨벳혁명 25주년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자며 벽을 하얗게 칠했고, 존레논의 war is over를 패러디해 wall is over를 적어놨으나, "The wall is never over"라는 글귀가 적히면서 다시 또 벽에는 낙서가 한가득 되었다고,
드레스덴에서
주차장 1 : Schießgasse 6 , 01067 Dresden - 1시간에 0.5유로
주차장 2 : Landhausstraße 2 , 01067 Dresden - 1시간에 1.5유로
점심먹을 곳 : Kutscherschanke 브륄의 테라스 옆 (Münzgasse 10 , 01067 Dresden)
오믈렛 9유로 정도 강추 한다고 함.
kutscherschmuas 가 메인 메뉴 Home Special이라고 함 1인에 17유로 정도.
드레스덴에서는 투어 코스가 어떻게 되냐면
드레스덴 주차장
성모교회
군주의행렬
레지덴츠 궁전
츠빙거궁전옆으로 가서
츠빙거궁전입구 왕관의문
츠빙거궁전
오페라하우스
궁전교회
브륄의 테라스
아우구스트다리보고
밥먹으로 Kutscherschanke
다시 주차장으로
성모교회
드레스덴 성모교회(독일어: Dresdner Frauenkirche)는 드레스덴에 있는 루터교 교회이다. 본래 가톨릭 교회였으나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 교회가 되었다. 개신교 종교건축의 대표적인 예시로 평가되고 있다.
18세기에 지어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드레스덴 폭격 때 박살이 났고, 동독 정부는 잔해를 전쟁기념관으로 보낸 채 교회는 방치했다. 독일의 재통일 이후 복원이 시작되어 2004년에 외벽 복원이, 2005년에 내부 복원이 완료되었다.
(전쟁당시 시민들이 잔해에 번호를 세겨 집에 모아두었다는 말도 있음.)
군주의행렬
1876년 레지덴츠 궁전 담장에 베틴 왕가의 역대 군주 35명과 과학자 등 주요인물 59명을 연대기식으로 그린? 벽화입니다. 1907년 마이센 도자기로 24,000개 이상의 타일을 만들어 모자이크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벽화의 길이가 101m에 달한다고 하니 엄청난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왼편이 연대기의 시작이고, 오른편이 가장 최근의 인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이센 도자기는 세계적으로도 엄청나게 고가의 도자기라고 함. 지금도 역시)
레지덴츠궁전
바이에른 공국을 통치했던 비텔스바흐 왕가의 궁전이었던 곳으로 1385년에 처음 세워진 후 확장을 반복해 현재에 이른다. 19세기 루트비히 1세 무렵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을 보았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대부분 파괴되어 최근 복원된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증축된 거대한 규모의 궁으로 왕족들이 방을 찾다 길을 잃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는 독일에서 손꼽히는 궁전 박물관으로 그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넓은 건물에 박물관, 보물관, 구 레지덴츠 극장, 화폐 수집관 등 여러 전시관이 있으므로 전부 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관심 분야를 정해 선택적으로 관람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주목할 만한 전시관은 선조의 갤러리(Ahnengalerie)로, 황금색 장식으로 꾸며진 화려한 갤러리에 신화 시대부터 비텔스바흐 왕가의 역대 왕 121명의 초상화를 전시하고 있다. 또 골동품 전시관인 안티쿠아리움(Antiquarium)은 르네상스 양식의 대형 홀에 귀중한 고대 조각들이 줄지어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전시관은 알브레히트 5세가 자신의 소장품을 보관하기 위해 16세기에 처음 만든 것이다. 자기공예를 전시하고 있는 자기전시관(PorzellanKabinett)도 볼만하다.
츠빙거궁전
그 시대의 정수를 한몸에 표현하는 건축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이다. 츠빙거 궁전은 아우구스트 2세 통치기 드레스덴에 풍부했던 예술과 문화를 반영하는 완벽한 미를 보여주고 있다. 마테우스 다니엘 푀펠만(1662~1736년)과 조각가 발타자르 페르모저의 작품으로, 화려한 축제, 공연, 그 밖의 여흥을 목적으로 회화 갤러리, 분수, 아케이드 등으로 장식되었다. 원래는 U자형 안뜰을 만들기 위해 한쪽은 엘베 강에 면한 테라스를 향해 개방하였다. 그러나 1847년 공사를 이어받은 고트프리트 젬퍼(1803~1879년)는 1854년, 북동쪽 윙에 덜 화려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회화 갤러리가 딸린 츠빙거 궁을 완성하였다. 젬퍼는 츠빙거 궁 바로 옆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젬퍼 오페라를 짓기도 했다.
츠빙거 궁전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크로넨토어('왕관의 문'이라는 뜻)와 프랑스 파빌리온이다. 그러나 츠빙거 궁전의 진정한 중심은 페르모저의 '님프 분수'의 돌 조각과 반짝이는 물이다. 수세기에 걸친 전화로 거듭 파손된 츠빙거 궁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다시피했다. 사실 이것은 비단 츠빙거 궁전뿐만 아니라 드레스덴의 모든 역사적 건축물이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다. 드레스덴은 전쟁 때 초토화되었다가 전후에 거의 완벽하게 복원한 몇 안 되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1945년과 1963년에 기초부터 철저한 복구공사를 거쳤으며 현재는 한때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렸던 이 도시의 잔해 속에 티 한 점 없이 서 있다.
오페라하우스
독일어로 젬퍼오퍼라고도 하는 젬퍼 오페라 하우스는 드레스덴의 심장부에 위치한다. 외부에서 보아도 그 평면 설계가 보이는데, 하나의 장방형에 가두기보다는 관객석의 곡선을 무대의 한층 높은 지붕과 연결하였다. 세 개의 출입문은 오페라 하우스를 둘러싸고 있는 광장 쪽으로 돌출해 있으며, 마차용 포치는 측면에 있다. 왕실 전용 출입문은 주축 위에 위치하는데 그 위로 벽감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콰드리가가 보인다. 로비는 스타일 면에서는 매우 절제되어 있지만 색깔 있는 대리석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거기다 회화로 장식하였다.
젬퍼 오페라 하우스는 당대의 건축 이론가 고트프리트 젬퍼(1803~1879년)의 초기 주요작 중 하나를 재건한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초기작들도 이곳에서 막을 올렸으며, 바그너와 젬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두 사람은 고대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신제를 연상시키는 떠들썩한 연극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하였고, 젬퍼의 화려한 장식은 그런 방향으로 일조를 했다. 1869년, 오페라 하우스는 화재로 불탔고, 젬퍼는 크게 상심했다. 그는 재건축 공모에 도전해서 결국 따냈고, 그의 두 번째 작품도 큰 호평을 받았다. 설계를 개선하기 위한 몇 가지 변화도 눈에 띄는데, 조각의 경우 거의 불타버려서 다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젬퍼 오페라 하우스는 사유가로서의 젬퍼의 놀라운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궁전교회
젬퍼오퍼 바로 옆에 있으며, 5000평의 부지에 높이 85m에 이르는 작센 지방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교회이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가에타노 키아베리의 설계로 1783년에서 1751년 사이에 지어졌다.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가 작센 지방을 다시 가톨릭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980년 이후 드레스덴-마이센 가톨릭교구의 대성당으로 사용되었다. 작센 가의 납골당이 마련되어 있으며, 독일 최초의 오르간 제작자로 유명한 질버만의 웅장한 오르간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로코코 양식의 설교단이 눈길을 끈다. 외부의 1·2층 꼭대기는 많은 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을 연상시킨다. 드레스덴의 약 90%를 며칠 사이에 잿더미로 만든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습으로 인해 궁정 교회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검게 그을린 건물 위에 흰색으로 보수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드레스덴 관련
블럭버스트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직역하면 블럭(block - 도시에서 도로로 구분되어지는 구역) 버스터 (buster) 버스트(bust)에 er이 붙어 불태워 버리는 것
도시의 한 블럭을 불태워 버릴 만한 물건, 즉 폭탄을 말함입니다.
이처럼 블럭 버스터란 이 말은 사실 알고 보면 참혹하기 그지 없는 말입니다.
# 블록 버스터 (block buster)의 시초
2차대전 당시 영국 공군 총사령관으로 1942년에 아더 T 해리스가 취임합니다
이 사람이 취임하기 전까지 영국공군은 완전한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한채 군사 및 군수시설에 야간공습으로 폭격을 시도했으나 그 결과가 그리 신통치 않았고, 많은 폭격기와 조종사만 희생됐습니다.
이에 아더 T 해리스가 영국 공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자 영국 공군의 폭격 양상은 180도 변합니다.
" 적국의 민간인도 적은 적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그런 적을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다. "
이런 말을 한 사람이 공군의 총 책임자로 있으니 적국인 독일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으로 자신의 도시가 초토화되기 시작합니다. (영국의 독일 공습에 비하면 독일의 런던공습은 새발의 피?)
그 유명한 융단 폭격이란 말이 생겨난 폭격 작전을 시작합니다.
그 취임후 첫 폭격인 쾰른 대공습을 1942년 5월 31일 시작합니다.
< 퀼른 대공습 전 후>
이 쾰른 대 공습에서 해리스는 무려 1080 대의 폭격기를 동원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쾰른 대공습으로 20분만에 도시가 초토화 되었고, 민간인 사망자는 6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해리스는 2차 대폭격을 함부르크에 감행합니다.
약 1000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었고 민간인 사망자는 약 5만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후 함부르크에는 고모라 작전으로 명명되어 1943년 7월 24일 부터 8월 3일까지
약 3천여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어 지속적으로 폭격이 행해졌습니다.
역시 5만명 가량이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고. 백만에 달하는 시민이 집과 삶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후 마지막 대공습이 시작되는데...이 것이 유명한 드레스덴 대 공습입니다.
이 시기 독일은 발지 대 전투로 알려진 마지막 동계 공세를 펼치나 연합군은 이를 물리칩니다.
이때 해리스는 독일의 항복을 앞당기고자 엄청난 명령을 내립니다.
바로 드레스덴에 공습을 명합니다.
드레스덴은 독일 문화의 정수가 집약돼 있는 곳이로, 엘베 강의 플로렌스라 불렸고, 건축물과 예술품들로 유명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로 손꼽여 많은 독일인들이 연합국의 폭격기가 민간인과 문화유산이 많은 이 도시를 폭격하지 않을 거란 희망을 가지고 이곳에 피난을 와 있던 상태였습니다.
아더 T 해리스는 바로 이점을 노렸던 것입니다.
영국공군은 미국과 연합하여 무려 3000대의 폭격기를 동원하여 드레스덴을 폭격합니다.
이 공습으로 인해 확인된 시신만 무려 4만에 달했으며... 엄청난 화염으로 인해 시신 자체가 남아 있지 않은 희생자까지 생각해본다면 대략 13만5천여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인 이곳의 상당부분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애는 데는 성공했으나, 군사적으로는 거의 얻은 것은 없었습니다. 있다면 군인이 이곳에선 더이상 충원되지 않았다는 정도...
전후 이곳의 복구 계획이 세워졌는데 너무 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복구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 장소를 완전히 허물고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것이라는 제안이 나올 정도였고, 여러가지 제안의 절충으로 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유명한 바로크식 건물들을 재건하고 바깥지역에 신도시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드레스덴 폭격 전과 후의 도시 항공사진>
이 항공사진만으로도 폭격이 어떠 했는지 짐작을 조금이나마 하실겁니다.
현재 영국에는 1992년 세워진 아더 T 해리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1992년 영국 여황에 의해 그의 동상이 세워질 당시 한 독일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히틀러 조차도 한시간에 10만명을 죽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가스실에선 수만명이 죽어갔지요... 독일인은 아마 이것은 부인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아더 T 해리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독일 민간인의 숫자는 50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바로 아더 T 해리스의 명령에 의해 폭격을 했을때 사용했던 폭탄(무게 4000~12000파운드)
의 이름이 블럭 버스터 였습니다.
도시의 한 블럭을 날려 버릴 만큼 크고 위력적인 폭탄....
그리고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킬.. 일으킨 영화를 부르는 블럭 버스터.....
(영국 공군의 랭카스터 폭격기의 폭격 장면과 아더 T 해리스 공군사령관)
아더 T 해리스는 드레스덴 폭격 후 비등한 여론으로 인해 물러 나야 했고, 전후 연합군 군사재판에서 당연히 처벌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1984년 91살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다 죽었습니다.
그의 끔찍한 어록 한가지를 덧붙이면
" 나는 사람을 죽이라고 이 자리에 앉혀졌다 "
-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 분의 가족이나 친구분이 독일의 런던 공습으로 피해를 입어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커 이렇게 크게 사고를 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후 융단폭격에 대한 분석을 해보면 군사적으론 큰 성과가 없다. 상대국 국민에게 더욱 큰 전의만 고취시켰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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