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8. 10. 16. 22:16

봉순이 언니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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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이제 우리에게는 너무도 먼 나라의 일인것만 같습니다. 저기 아프리카 어딘가의 이야기 그보다도 멀리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 곳 남미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의 실제는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아주 먼 엤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비록 저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주어지지도 않았던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살아가셨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가 혹은 할머니가 봉순이 언니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이야기일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아직 제 3세계의 국가로 분류되던 그 시절, 그 곳에는 눈물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남의 집에서 집안일을 해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잠자리를 제공받던 사람들, 자신의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어린 나이에 버림을 받고,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할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봉순이 언니도 그 사람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집에서 자고,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가족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봉순이 언니도 그랬습니다. 너무나도 구박받던 주인집에서 도망쳐 새로운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주인집은 가여운 그녀를 거둬주고 한 가족이라 말해줬습니다. 그녀를 잘 키워 좋은 집에 시집보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주인도 여유가 생기고 있는 집이 되자 그녀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집 사람들이 더 심하게 한다고 말하던 어머니도, 있는 집 사람이 되자 그들과 같이 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봉순이 언니는 하지도 않은 도둑질의 누명을 쓰고 주인으로부터 모욕을 당합니다. 있는 집 사람은 그렇게 매정했습니다. 결국 봉순이 언니는 눈이 맞은 남자와 도망을 갑니다. 


봉순이 언니는 새로운 삶을 꿈꾸며 희망을 갖고 도망을 가지만 그 삶은 참담했습니다. 계속되는 폭행과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주인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녀의 삶에 반전과 빛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이어진 그녀의 생활은 계속되는 반복이었습니다. 새로운 만남과 희망, 하지만 변하지 않는 암담한 현실, 불운과 불행은 그녀에게 꼬리표처럼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그녀는 어떠한 가난도, 불운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인생인듯, 그녀는 그것을 살아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삶속에서도 봉순이 언니는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냅니다. 그 웃음마저 없었다면 봉순이 언니는 어떻게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요? 자그마한 알사탕을 반으로 나눠서 먹는 나눠먹어야 더 맛있다고 미소짓던 그런 희망이 없었따면 웃음이 없었다면 봉순이 언니는 그 삶을 살아 낼 수 있었을까요?


그 시대에 수 많은 봉순이 언니들이 있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힘든 삶속에서 누구보다도 더욱 절망적일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꿈꾸고 웃음을 머금고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 삶이 희망이 비록 자신을 속일지라도 그들은 그랬기 때문에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삶을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부여잡고 살아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들의 희망과 웃음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과 발전의 빛에 눈이 멀어있는 이 순간에도, 성공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속에는 수 많은 봉순이 언니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을 부여잡고, 희망과 웃음으로 중무장한채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이 글은 공지영 작가가 자신에 대한 고백일것입니다. 주인공 짱아의 행동에 자신을 대입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 많은 봉순이 언니들을 외면했던 짱아의 행동에 투영시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도 그렇게 수많은 얼굴들을 눈빛을 외면하고 있을것입니다. 우리는 그늘에 가려진 수 많은 봉순이 언니들을 외면하며 빛만을 쫓아가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고 도망칠 수 있을지라도 결코 그 얼굴들을, 눈빛들을, 표정ㅈ들을 잊지는 못할 것입니다. 철저하게 희망과 웃음을 쫓아 힘겨운 삶을 살아내는 수 많은 봉순이 언니들을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을것입니다. 


매년 겨울이면 사랑의 온도탑 채우기 모금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매년 100%를 목표로 모금행사를 하고 있지만, 점점 모금액의 액수는 적어지고 탑의 높이도 같은 기간 대비 낮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는 작년에 비해 50%나 급감했다고 하니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있고 그로 인해 국민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시 우리나라 전체적인 경제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의 반증이기도 할 것입니다.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말하는 사람의 수도 점차 적어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입니다. 비단 한 사람만의 원인은 아닐것입니다. 점차 쓰러져가는 우리나라라는 배가 안쓰러워보입니다. 어떤 계기가 필요할것 같습니다. 터닝 포인트 같은 이벤트가 있어야 할 것같습니다.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굉장히 힘들고 지쳐서 쓰러지고 싶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록 더욱더 봉순이 언니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 알아야 했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아주 오래도록 사람들은 누구나 진실을 알고 싶어하진 않는 다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몰릴 지경만 아니라면,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조차도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그렇다고 이미 생각해온 것, 혹은 이랬으면 하는 것만을 원한다는 것을 제가 그린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났을 때, 길이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있다면 아마 길을 제 지도에 그려진 대로 바꾸고 싶어하면 했지, 실제로 난 길을 따라 지도를 바꾸는 사람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그림책에 얼굴을 박고 있었지만 나는 여기 아닌 '저기'의 일에는 사실은 관심이 없었다. 심심한 오후나 저녁 내내 끈질기게 책을 붙들고 있었고 그 아름다운 내용에 가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지만, 대체 그들이 나와 무산 상관이란 말일까? 나는 언제나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가장 흥미를 느꼈고 그들은 누구며, 그래서 대체 나는 무엇인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삶에서 사소한 일이 없는 이유는, 매 순간 마주치게 되는 사소한 선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소한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트는 삶의 덩어리가 중요하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저 하루 하루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갔던 봉순이 언니의 삶.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져가는 것 같은 나의 삶은 그래도 봉순이 언니의 삶보다는 편한 삶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이 많이 부족하고 답답하고 그렇다면, 봉순이 언니의 책을 한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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